1. 바람이 불지 않는 들판은 낯설다
전라남도 영암은 논농사와 밭작물이 조화를 이루는
전형적인 남부 평야지대다.
특히 여름철이면 바람이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습기를 식혀주고, 작물의 수분 스트레스를 낮추는
자연 환기 장치 같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25년 여름,
나는 영암 삼호읍 일대 들녘을 걷다
몸에 닿는 바람 한 줄기 없이 정체된 공기 속에서
논밭이 숨막히는 듯한 풍경을 마주했다.
B씨(60대 농민)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 같으면 오후 되면 논바람이 시원했는데
올해는 해만 쨍쨍하고 공기가 가만히 멈춰 있어요.
사람도 벼도 힘들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이지만,
들판에서 바람이 사라졌다는 건
기후 시스템의 또 다른 축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 글은 영암에서 실제 체감한 풍속 감소 현상,
그리고 그것이 작물, 환경,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기록한 현장 보고다.
2. 풍속 1.2m/s 감소, 사라진 자연 환기
기상청 2025년 6월 발표 자료에 따르면
영암군의 6월 평균 풍속은 1.8m/s,
이는 10년 평균인 3.0m/s보다 1.2m/s 감소한 수치다.
하루 바람 없는 시간(무풍 시간)은 2023년 대비 28% 증가했다.
일반적으로 바람은 여름철 작물에게
- 수분 증발 조절
- 병해 억제
- 해충 확산 억제
- 온도 완화
라는 기능을 해준다.
하지만 바람이 줄어들면 - 지표면 온도 급상승
- 작물 증산량 감소 → 생장 지연
- 병충해 확산 → 농약 의존도 증가
라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C씨(영암군 농업기술센터 연구원)는 말한다.
“올해는 바람이 없어서,
벼는 통풍이 안 돼 이삭이 익다가 멈추는 현상도 있어요.
옛날엔 생각지도 못한 문제죠.”
이처럼 바람의 부재는 작물 생장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3. 바람 없는 여름, 작물도 사람도 지친다
바람이 없다는 건 단순히 ‘덥다’는 문제가 아니다.
온도 체감의 문제, 습도 유지, 물빠짐과 증산 조절까지
모두 바람이 해오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균형이 깨지면,
작물뿐 아니라 사람도 농사일을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
A씨(50대 고추 농가)는 이렇게 말했다.
“하우스는 그냥 지옥이에요.
문 열어놔도 공기가 안 움직이니까
고추가 숨을 못 쉬는 느낌이에요.
잎도 쳐지고, 병도 많고.”
또한 바람이 줄면 해충은 더 빠르게 퍼진다.
풍속이 줄면 해충의 산란 확률이 높아지고,
병해 확산 속도도 빨라진다.
결국 바람이 사라진다는 건, 농약 사용량 증가와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손실로 직결된다.
4. 바람은 기후의 언어였다
기온, 강수, 습도와 함께
풍속은 기후 시스템의 주요 지표 중 하나다.
그동안 우리는 ‘더워졌다’, ‘비가 안 온다’에는 익숙해졌지만,
‘바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경고는 자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영암의 들판은 지금 말하고 있다.
“이제는 바람조차 제때 불지 않는다”고.
풍속 감소는 단지 올해 여름의 특징이 아니라
전 지구적 고기압 장기 정체 현상,
해양 순환 이상, 열섬 효과 증가 등과 연결되는 복합 기후 변화의 결과다.
나는 이번 여름,
바람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도 확실한 기후 신호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체감했다.
들판에 서 있어도 시원하지 않은 여름,
그건 자연이 우리에게 던지는
‘이제는 진짜 달라졌어’라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를 기록할 것이다.
우리를 통해 이 조용한 변화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바람처럼 사라지는 계절의 감각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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